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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몸을 떨리게 하는 것은모두 님이다 / 다시개벽 제7호 권두언
    계간 다시개벽 2023. 5. 16. 11:47

    홍박승진

     

    권두언을 적기에 앞서 한 가지를 바로잡자. 지난 『다시개벽』 제6호(봄호) 가운데 차옥숭 선생님과의 인터뷰에서 “오키나와 주민 학살과 집단 사살”은 ‘오키나와 주민 학살과 집단 자살’로 고쳐야 한다(「모든 종교는 ‘나 없음’에서 만난다」, 161쪽). 오키나와 주민 집단 자결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의 상륙 공격이 임박해오자 죽음을 택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일본군의 강요로 오키나와 주민과 가족이 서로를 죽인 사건으로서, 희생자가 수천 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오키나와 주민들 화났다…‘집단자결’ 역사 왜곡 규탄」, 『한겨레』, 2007. 9. 30). 차옥숭 선생님께서 인터뷰 내의 표기 오류를 직접 발견하시고 일러주신 덕분에, 해당 인터뷰 녹취록을 정리하였던 나는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낱말 하나하나의 힘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를 배웠다. 이 자리를 빌려서 선생님께 엎드려 절을 올린다.
    이번 『다시개벽』 제7호(여름호)에 모신 글들은 편편이 아름다운 문장을 품고 있었다. 대체로 권두언은 큰 주제를 먼저 말한 다음에 그 주제가 각각의 원고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소개하는 연역적 방식으로 쓰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호 권두언은 각각의 원고에 들어 있는 눈부신 문장들을 선보인 다음에 그 문장들이 어떻게 하나의 큰 주제로 모이는지를 밝히는 귀납적 방식으로 쓰고자 한다. 평소에 나는 한 편의 글에서 몇 개의 문장만을 떼어내어 즐기는 행태에 거부감이 있는데, 왜냐하면 글맛은 첫 문장의 인식이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깊어지고 넓어지고 달라졌는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한 성향과 어긋나게 글마다 나의 눈길이 오래 머문 문장을 수집가의 마음으로 추려내어서 진열해보고 싶다. 그 문장들을 읽으면, 그것들이 숨어 있는 글 전체를 읽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리라는 생각에서다.

    집채만 한 분노가 내 안에서 파도쳤고 손에 잡히는 거라면 모두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마비가 오는 듯 손가락이 오그라들어 펴지지 않았다. 힘이 풀려 버린 다리와 굳어 버린 손가락을 보며 무서워 울고,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괜찮다며 꼭 안아줬다.
    (윤혜민,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데도 불구하고 모임이 깨지지 않고 이어지는 데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외로워서요.”
    (신채원, 「생명학연구회, 무엇을 연구할까」)

    프란치스코 교종은 “모든 이가 여전히 긍정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며, “우리의 모든 약점에도 우리가 사랑으로 창조되었기에 반드시 관대함과 연대와 배려에서 나오는 행동이 샘솟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과학적 맹신과 자본과 소비의 맹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되어 모든 창조물을 보살펴야 하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인간이 행동한다면 해결 방법은 분명 있다.
    (맹주형, 「생태 문명으로의 전환을 위한 천주교 창조보전운동―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통해 개벽 바라보기」)
    라투르는 가이아를 글로브(Globe)와 구분한다. 글로브에는, 그것이 종교적이든 과학적이든, 주재자나 통제장치가 있다는 함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이아는 글로브와 달리 예측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겪고 있는 기후변화나 자연재해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가이아는 근대적인 종교나 과학의 틀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가이아는 ‘근대적’이지 않다.
    (조성환,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라투르의 가이아론을 중심으로)

    연약한 생명체에 깃든 신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을 보는 이로 하여금 자기 안의 연약함을 자각하고, 그것이 상처받거나 짓밟히거나 파괴되는 상상을 통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게 하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연민’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자기 안에 남아 있는 희망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권수현, 「연약한 생명체에 깃든 신―감각적·정동적 인식론으로서 페미니즘」)

    덧없음 혹은 취약함의 감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그 자체의 광대함, 우리의 존재를 넘어선 곳에서 펼쳐지는 것에 대한 공포 같은 것과 연동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아닌 것과 만나고 연관되어 간다.
    (시노하라 마사타케, 조성환 옮김, 「인류세 시대의 인간과 자연―폐허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나’는 자신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가능성으로서 모성성을 상징하는 “내 안에 꽃 한 송이” 또는 “나/자신의/엄마”를 모색한다.
    (임동확, 「장바닥에 비단이 깔릴 때―김지하의 개벽사상과 모성성의 모색」)

     

    이 문장들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는 수동성이다. 우리는 대개 수동성과 능동성을 한 개인이 활동할 때의 두 가지 대립하는 방향성으로 여기고는 한다. 거기에 덧붙여서 한 개인의 활동이 수동성을 벗어나 능동성을 얻을수록 그 활동은 더욱 자유로운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여기에 골라놓은 문장들의 아름다움은 까닭은 수동성과 능동성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깨뜨리는 자리에서 비롯한다. 나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이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나의 움직임은 표면적으로 내가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천적으로는 내 바깥의 무언가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이다. 손가락이 펴지지 않을 만큼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부수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나를 페미니즘으로 이끌듯이.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 나로 하여금 생명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듯이. 우리는 사랑으로 창조되었기에 우리 마음속에서는 사랑이 샘솟을 수밖에 없듯이.
    사정이 이러하다면 수동성과 능동성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으며, 또한 나의 안과 밖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개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수동성과 능동성을 구분하려 하므로 수동성은 개인의 자유가 줄어드는 방향이며 능동성은 개인의 자유가 늘어나는 방향이라고 오해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울타리를 우주로까지 넓혀서 생각하면, 수동성은 우주가 나에게 힘을 가하는 방향이며 능동성은 내가 우주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상호작용하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개인의 울타리 안에서만 능동성을 키우려는 것은 우주와의 상호작용을 단절시키려는 짓이 되지 않는가? 지구를 인간이 완전히 예측할 수 있고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한 서구 근대 문명이 오늘날 기후 위기와 같은 파국을 불러왔듯이. 이와 반대로 개인이 우주라는 큰 흐름 속에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내맡겨져 있음을 깨닫는 것은 오히려 개인의 역량과 그 범위를 한 개인의 바깥으로 넓히는 일이 아닌가? 나 아닌 연약한 생명체가 고통받는 모습은 나의 연약함이 짓밟히는 모습을 상상케 하고 그리하여 고통받는 모든 생명에의 사랑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신성(神性)을 띤다고 할 수 있듯이.
    우리가 극복의 대상으로 오해하기 쉬운 수동성이 근본적으로 참된 능동성임을 놀랍고도 또렷하게 보여주는 사례로는 수운 최제우와 하늘님 사이의 문답이 이루어진 과정을 꼽을 수 있다. 이 문답에서 특히 널리 알려진 대목은 하늘님이 최제우에게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라고 말한 부분이다. 이 구절이 ‘인간의 마음과 하늘의 마음이 동일함’을 뜻하며 동학(천도교)의 시천주 및 인내천 사상이 여기에서 비롯한다는 점은 동학을 조금이라도 들추어본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개체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라는 사유는 능동성의 극치를 가리킨다. 하늘님의 속성, 즉 신성은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제우와 하늘님의 문답에서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능동성의 극치에 관한 깨달음 직전에 수동성의 극치에 관한 경험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 대목은 『동경대전』 「동학론-논학문」에 나온다.

    몸이 많이 떨리면서 밖으로 신령과 접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말씀이 내리는 가르침이 있었다. 보는데 보이지 않고 듣는데 들리지 않으므로 마음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져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르게 하여 여쭈었다.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대답하되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
    (身多戰寒 外有接靈之氣 內有降話之敎 視之不不見 聽之不聞 心尙怪訝 修心正氣而問曰 「何爲若然也?」 曰 「吾心卽汝心也.」)

     

    위의 인용문에서는 “몸이 많이 떨렸다”라고 간결하게 표현하였지만, 한글 경전인 『용담유사』의 관련 대목에서는 최제우가 공중에서 소리가 들려 천지가 진동하는 느낌을 받아 정신을 못 차렸으며 이 모습을 본 그의 아내와 자식이 경황실색하며 어찌할 줄 모르고 울거나 허둥지둥댔다는 정황을 자세히 그려두었다(『용담유사』 「안심가」). 통념에 가득 찬 마음으로 바라보면 내 몸이 통제할 수 없이 안팎으로 떨리는 것은 괴이하고 의아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통념을 맑게 닦아낸 마음으로 바라보면 나의 몸을 안팎으로 움직이며 생동케 하는 힘의 원천이 바로 하늘님임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내 몸을 떨리게 하는 모든 것은 신성을 띤 것이다. 그것을 다 님이라고 부르자. 그리하면 세상은 그전처럼 보이지 않기 시작하고 우주는 그전처럼 들리지 않기 시작한다.

    이 밖에도 <다시잇다> 꼭지에는 서양철학에 관한 동학-천도교 쪽의 수용 과정을 보여주는 조종오의 「철학! 철학!!」, 이번 호부터 그 번역이 연재되기 시작하는 이쿠다 조코·혼마 마사오의 『사회개조 8대 사상가』 서론 및 제1장 마르크스 편,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상태보다는 어떠한 종류이든 새로운 지식과 사상을 흡수하고 체화하려는 상태가 훨씬 더 달갑다고 외치는 박달성의 「급격히 향상되는 조선 청년의 사상계, 축하할 만한 조선 청년의 지식열」, 동학-천도교에서 마음 개념의 의미를 상당히 구체적인 수준에서 논의한 박희택의 「마음은 도의 근본」이 들어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 적실하게 과거의 글을 번역해주신 조성환, 김정현, 박은미, 성강현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다음 호인 『다시개벽』 제8호(가을호)의 기획 주제는 ‘이동을 둘러싸고 지구사회를 조직하는 방식 속에서 소외되는 생명들’이다. 오늘날의 지배적인 문명은 편리와 속도를 행복과 쾌락의 표준으로 삼고 그쪽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욕망을 부추긴다. 이 욕망이 어째서 문제인가? 인간 중에는 스마트폰 등의 고속이동 문화 아래서 소외되는 이동 취약 계층이 있으며, 비인간 중에는 고속도로와 철도 등의 산업문명 인프라 구축 과정에 따라 이동권을 상실하는 동물이 있다. 이동의 문제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 사회와 자연은 구분되지 않는다. 최근에 불거진 사건 같지만 실제로는 20년 동안 지속되어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투쟁은 이동이야말로 인간을 비롯한 뭇 동물이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임을, 그리하여 인권의 바탕에는 동물권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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