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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동을 다시 생각한다 / 다시개벽 제8호 권두언
    계간 다시개벽 2023. 5. 16. 12:03

    우석영

     

    변화라는 뜻에 ‘움직임’이라는 뜻을 가미한 ‘변동(變動)’이라는 단어와는 달리, ‘이동(移動)’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좀 더 구체적 이미지와 더불어 환기된다. ‘변동’보다 ‘이동’이라는 말이 훨씬 덜 추상적이고 더 구체적이다. 그건 이동이라는 용어가 장소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공간과는 달리 장소는 구체적인 체험의 영역이고, 바로 그 장소를 옮기는, 살(肉)로 체감되는 행동을 우리는 이동이라고 부른다.
    46억 년에 이르는 장구한 지구의 역사를 우리는 ‘이동’이라는 키워드로 읽고 또 그림 그려볼 수도 있다. 불기운으로 가득한 거대한 구체(球體)였던 원시 지구에서는 각종 가스들이 지구 밖으로 이동을 시작하지만, 지구 인력이 그 이동을 가로막는다. 우리가 아는 대기권은 바로 이런 식으로 형성되었다. 태양계에서 지구 쪽으로 쏟아져 내린 암석 파편들 중 일부는 지구의 중심으로 가라 앉아 금속성의 핵을 형성했고, 일부는 그 위로 떠서 마그마라는 물질로 변성했다. 마그마는 이곳저곳에서 솟구쳐서는 불의 강을 이루어 바다로 이동해서는 바다 밑바닥에 퇴적되었다. 이런 식의 열의 분출, 이동, 냉각[소멸]이, 즉 태풍처럼 하나의 삶의 주기를 이루는 열의 순환이 반복되는 가운데 지구-암석은 점차 층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대도약’이라 칭할 만한 사건이 터져 나왔다. 박테리아가 바다에서 탄생한, 과학자들이 여전히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는 신비한 사건이었다. 이어서 광합성하는 박테리아가 바다에서 나타나자, 이번에는 산소가 바다에서 대기로 대이동을 시작했다. 대륙의 융기라는 땅의 이동이 발생한 후, 녹조류를 선두로 바다 식물들이 육상으로 이동했는가 하면, 뭍으로 서식지를 옮긴 식물들은 씨를 만들고 키를 키워 더 멀리 퍼져나갔는데, 이들의 행동 역시 서식지 넓혀가기 또는 서식지 이동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동물’이라는 말은 숫제 ‘[이]동하는 [생]물’이라는 뜻이다. 살기 알맞은 장소에 터잡고 살기란 식물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긴요하다는 간명한 이 진리는, 지금도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며 사는 여러 철새들이 생생히 입증해주고 있다.
    인류의 여러 민족과 부족에게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의 이동은 지구가 요청한 제일의 명령이었다. 물이 풍족한 곳, 먹이가 넉넉한 곳, 숲이 있는 곳─이런 곳을 찾아 수만 년 전 현생 인류는 걷고 또 걸었다. 나중에는 곡물과 과실수를 기르기 좋은 땅을 찾아 이동했고, 세월이 더 지나자 어디에 자리 잡는 것이 좋은지를 다루는 사상(풍수 사상)이 태동하고 발달했다. 또한 더 큰 부와 권력을 찾아 많은 이들이 도시 중심부로 몰려들었다, 두 발로 걸어서, 수레를 타고, 말을 타고….
    한편, 석탄과 석유와 가스를 지층에서 캐내 도시 인근의 공장과 발전소로 이동시키는 대사건이 발생하고, 증기기관과 내연기관과 가스터빈이 발명되고 기차와 증기선과 자동차와 항공기가 지구의 여러 길을 오가게 되면서, 지구 안 물질의 이동 속도가 급증하게 된다. 남반구에서 북반구로 잘린 마호가니가, 팜유와 설탕이, 소의 살점이, 유색인 노예들이, 화석연료 안의 탄소를 대기권으로 쉼 없이 이동시키는 증기선을 타고 더 신속히 이동했고, 콜레라나 홍역 같은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들이 바로 그 증기 무역선에 몸을 싣고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력으로 이동했다. 시간을[속도를] 통제함으로써 공간을 통제하게 된 근대(지그문트 바우만)의 태동과 발전의 배면에는 이처럼 고속 이동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인류세’를 증기의 힘으로 지구 물질 이동 속도가 가속화된 시대, 물질 이동이 범람하게 된 시대로 규정할 수도 있다. 앞으로 기후재난 사건이 인류사회를 충격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새 거처를 찾아 생존을 위한 이동을 해야 할 것이되, 이 역시 물질 이동의 범람, 그 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조금 결을 달리 말해, 이러한 범람의 다른 이름은 ‘뿌리 뽑힘’이다. 인류세는 지구의 물질이 뿌리 뽑혀 제자리에서 타지로 대거 이동하게 된, 이동하고 있는 시대를 일컫는다.
    이와 같이 ‘이동’은 지구와 인류의 역사, 생물의 생존과 욕망, 우리가 처한 작금의 물질적 · 사회적 현실을 두루 설명해내는 놀라운 열쇳말이다. 이동은 살아감, 번영, 자유와 권리, 착취와 탐욕, 생태적 오염과 교란, 시대 대전환 또는 개벽 같은 여러 주제를 가로지른다. 『다시개벽』 이번 호는 이동이라는 주제가 가 닿는 여러 표면 중 일부를 조명한다. 주용기는 뉴질랜드와 한국, 일본,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땅을 오가며 사는 어떤 이들의 삶과 곤경을 한눈에 보여준다. 특히, 한국의 서천 지역 갯벌을 중간기착지로 삼는 큰뒷부리도요의 여정을 추적하며 그들이 살아내는 시간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또한 황해 갯벌을 찾는 이들 도요새들의 삶이 새만금 개발구역에서 추진되어 온 사업으로 어떻게 위축되었는지, 갯벌의 삶과 개발 욕망 간 생태전쟁이 2022년 9월 현 시점에서 어떤 국면에 접어들었는지 알려준다. ‘코로나19 이후’에도 아랑곳없이 추진되는 새만금국제공항 개발 사업에서 우리는 무뇌아적인 탄소 근대인의 욕망을, 맹목의 질주를 읽어낸다. 지혜와 비전이 있는 시대로 현재의 궤도를 옮기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서재현의 글은 이른바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에 시선을 둔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참사 이후에 시작돼 20년 넘게 지속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현실은, 저 새만금 개발구역만큼이나 우리 사회의 흉측한 얼굴이다. 물론, 미와 추라는 고정된 것, 객관적 잣대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서재현은 장애인 이동권 보장으로의 몇몇 전진을 조목조목 짚어내며 우리 사회가 이 사안을 계속해서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 역시 확인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더딘 전진’의 심층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괴물 같은 시선과 마음임을, 인간의 개벽만이 이 더딤의 추를 넘어서는 길임을, 서재현의 글을 읽으며 되새기게 된다.
    홍경실은 서구 근대의 인간중심주의 철학을 극복하기 위한 한 철학적 운동으로서 베르그송의 철학 담론을 소개하며 이동이라는 화두를 생명[살아있음], 지속(la durée), 개벽, 자유, 몸, 정체성과 연계지어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생명의 흐름과 운동을 가로막음이 우세하는 상황에서 이것을 뚫고 삶을 새롭게 재개하려는 지향과 실천이 곧 개벽이고 자유라고 말하며, 동학사상을 베르그송 철학의 콘텍스트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새 삶을 찾아가는 인간의 이동, 이민 아닌 망명을 생명의 성스러운 행군으로 봐야 한다는 글쓴이의 언급은 신선하다. 2022년 우크라이나를 빠져나갔던 난민도, 1950년대 초반 함흥에서 부산으로 이주했던 한국인도 이 성스러운 행렬의 주인공이었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행렬, 그러나 살고자 하는, 뭇 산 것들의 몸짓 전부가 성스러운 행렬이 아닐까, 그렇게 나는 생각해보게 된다.
    강주영의 글은 좀 더 스케일이 크다. 강주영은 근대산업문명을 ‘생산문명’이라 통칭하면서 바로 그 생산문명이 이제는 ‘생성문명’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문명이동론을 제출한다. 오늘날 지구가 ‘지구개벽’과 같은 사건[기후변화]으로써 사회개벽을 촉발하고 생성하고 있다는 판단을 밑에 깐 채,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관계가 지구의 생성력 한도에 맞추는 관계, 즉 생성관계로 탈바꿈되어야 한다고 제안하는가 하면, (지구의 생태수용력 안에서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발전을 추구한다는 것이 탈성장의 본질이라는 지적은 명쾌하다) 복잡계 이론과 양자역학의 여러 결론을 개괄하며 이를 수운의 무위이화, 불연기연, 조화정과 연결 짓는데, 글쓴이에 따르면 이것은 동학을 ‘지구생성살림론’으로 확대하려는 기획의 산물이다. 나아가, 글쓴이는 탈성장 생성경제로의 이동을 위한 구체적 행동들의 목록을 끝에서 제시하는바, 새로운 경제를 모색하는 시선이 머물 만한 대목이다.
    이화서원, 공책여행, 지리산정치학교, 생명학연구회 등 새로운 삶과 질서를 꿈꾸고 도모하는 도반들의 정겹고 반가운 글들이 이번 호에도 동승했다. 권이현은 암의 발병이라는 큰 사건에 부딪혀 어떤 삶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는지, 그 걸어감 속에서 심신과 한울의 관계라는 주제에 어떻게 자신의 생각이 가 닿았는지를 차분히 들려준다. 서혜원 역시 자신이 어떤 경로로 새로운 생각으로 이동하게 되었는지 진솔한 고백담을 들려주며, 독자로 하여금 ‘무력한 나’에서 ‘큰 나’로 남는 삶의 길이 무엇일지, 묵상케 한다. 이무열의 글은 문명 전환을 위한 한 정치학교의 실험을 담담히 소개한다. “끊임없이 판을 뒤집고 도약할 수 있는 정치 사건을 생성하는 느슨한 네트워크이면서 정치플랫폼의 준비단계인 프리플랫폼”이라는 지리산정치학교의 모습을 설레는 마음으로 만나보자. 생명학연구회의 신채원은 연구회에서 『지구인문학의 시선』을 함께 읽고 토론한 바를 공유함으로써 이 책을 미리 읽는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한편 이번 호 〈다시 읽다〉와 〈다시 잇다〉에서 우리는 쉽게 눈을 떼기 어려운 글들과 행복하게 만난다. 홍박승진은 한국어의 품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의 마음을 채워주고 길러주었던 윤석중 동시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데, 새롭게 찾은 1938년 이전 윤석중의 작품 44편 가운데 동시 11편의 말끔한 얼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33편의 동화, 유머, 라디오 대본은 다음 호에 실릴 예정이다.) 이은홍의 글은 최근 발간된 『개벽의 사상사』에 관한 서평으로, 이 책의 성취와 한계를 퍽 잘 드러내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에서는 ‘개벽’을 근대 적응과 근대 극복을 동시에 해내야 했던 근대 한국사상, 그 역사에 편재하는 하나의 ‘패턴’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은홍은 이 책에서 “결국 토착적인, 자생적인 한국 근현대사상사의 서술 대상”으로서 “개벽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료한 답변을” 찾기 어려웠다고 진단함으로써 그 ‘패턴’이 무엇인지에 관한 저자들이나 편집자의 관점이 불명확하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박길수는 이돈화가 쓴 제사론과 영혼론(『개벽』 제5호, 1920.11.1)을 새롭게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는데, 천도교의 우주관, 인간관을 다시금 밝게 알아보고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글이다. 『사회개조 팔대사상가』 번역 시리즈 이번 편은 상호부조 사상가로 유명짜한 표트르 크로포트킨을 다루고 있다. 『한 혁명가의 회상』을 “일대 예술품”으로 평하는 저자들은 이 글에서 크로포트킨의 생애를 짧지만 내실 있게 더듬으며, 그 흥미로운 여정의 윤곽을 잡아낸다. 글을 읽으며 독자는 서혜원이 말한 ‘큰 나’로의 이동이 무엇인지를 곱씹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이 이 글이 전하는 가장 강렬한 향기가 아닐는지. 물론, 그것은 결정적으로는 인간 크로포트킨의 향기일 것이다. 상호부조 사상을 깊이 있게 알려주지는 못하지만, 크로포트킨이 남긴 각 저술이 어떤 개인사적 국면에서 생산된 것인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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